박주동 목사
2025.04.13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5장 5절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게 될 텐데,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5장 1절부터 11절까지 말씀을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5장 1절부터 11절까지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계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또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아멘 5절 말씀을 한번 제가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부분이 이 점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이렇게 부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성경이 우리에게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분화된 존재 그 존재 되었다 하는 거를 가르쳐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게 이제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로운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인지를 우리가 잘 생각해야 되는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은 어 현재적으로 어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머물러 있지 않아 머물러 있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나와 이렇게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 같고 나를 충분히 사랑해 주지 않는 것 같고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우리는 이제 그런 생각이 잘 이렇게 떨어지곤 하는데 성경을 이렇게 잘 들여다보게 되면 특히 이 로마서 5장 5절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각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냐 하면은 우리의 어떤 마음의 상태 심지어는 우리의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고 있거나 누리고 있지 않거나 하는 어떤 그런 우리 상태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임해진 시여된 그런 존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신다고 하면 그냥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일부분만 이렇게 주시지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런 분이 아니시거든요. 하나님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면 하나님의 존재 전체를 우리에게 탁 주세요.
그러니까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 너희가 그런 사랑을 받았다 하는 것을 하나님이 사실은 우리한테 더 말씀해 주고 싶어 하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어떤 신앙의 심지어는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그 충만한 사랑이 이미 공급되어진 존재고 그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언제든지 받기에 충분한 그런 존재인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죠 네 그래서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굉장히 이제 중요한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메시지인데 우리가 신앙생활이 어떤 내가 잘하고 못하고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다 부어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의 어떤 성격을 잘 표현해 주는 부분이 우리가 이제 잘 아는 하나님의 아버지 대신과 이제 우리의 자녀 됨.
성경에 이 두 용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그렇게 표현해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너 너희의 아버지시다 그리고 아버지 되어 주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십자가를 통해서 그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난 이후에 그렇죠 그 즉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장차 어떻게 인류를 이 타락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실 건가에 대해서 어떤 시사하는 그런 하나님이 사실 말씀을 전해 주시거든요.
초기에는 우리가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실 건가가 명확하게 이렇게 드러나지는 않거든요.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그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오시고 또 하나님께서 인류와 이렇게 계속해서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이렇게 하신다는 것을 계속해서 드러내 주세요.
그래서 이제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그 아담의 후손들이 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면은 인류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죠.
정상적이지 않고 계속해서 깨어지는 어떤 모습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직접 이제 정 안 되니까 직접 찾아오셔가지고 말씀해 주시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아주 구체적으로 진행해 가세요.
그 구체적으로 진행해 가는 그 역사가 우리가 아브라함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에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하면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역사를 이렇게 보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이제 인도해 가시면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그 이전에 노아나 사실은 아담과도 맺었던 그 하나님의 언약이거든요.
언약 그 언약을 아브라함과 다시 체결하는 것을 보게 돼요.
근데 하나님의 언약 체결이 이제 이게 대단히 중요한데 그럼 언약 체결의 그 성격이 뭐냐 하면 어 내가 너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겠다 하는 그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의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사실은 이제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가 돼 주겠다는 거죠.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 하는 거고 너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 자녀가 될 것이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기본적인 성격이 그거예요.
근데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이렇게 쭉 이렇게 보게 되면 하나님이 결국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끊임없이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최종적으로는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려고 하는 그 의도가 조금씩 조금씩 사실은 나타나죠.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야곱이 있고 그렇죠 야곱을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이렇게 등장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출애굽기를 보게 되면은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을 부를 때 아주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거든요.
이스라엘은 내 장자다 그래요. 우리는 이제 신약 시대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아버지시다 하는 게 굉장히 익숙하죠.
근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게 그렇게 편안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에는 하나님이 너무 높은 분이시고 너무 가까이 가기에는 두려우신 분이시고 거룩하신 분이시고 그런 어떤 이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이 갖고 있고 또 하나님 앞에 자기들이 조금 잘못했을 때 엄청난 벌을 받은 경험이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굉장히 조심스럽죠. 근데 사실 그게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어떤 본심은 아니거든요.
그 과정을 통해서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최종적으로는 내가 너희의 아버지다 너희는 내 장자다 하는 거를 심어주고 싶어 하세요.
그러려면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잘 이렇게 회복돼야 되는데 그 관계에서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했던 게 뭐냐 하면 너희는 나를 잘 믿으라는 겁니다.
제발 나를 떠나지 마라 나 잘 믿고 믿어라.
그래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 이렇게 살아야 된다 하고 이렇게 주신 것이 있어요.
그게 율법이지 않습니까? 율법 율법을 우리가 많이 오해하거든요.
우리 특히 한국 교회도 많이 오해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잘 지켜서 의에 이르고 그 의를 근거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큰 은총을 받는 구원의 은혜를 받는 그 수단으로 많이 생각을 했어요.
한국 교회가 그 정도는 아닌데 그래도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면 뭔가 하나님께 칭찬받을 것 같은 그런 어떤 느낌이 이제 우리 의식 속에 있단 말이죠.
그게 사실 이제 율법주의적 영향을 우리가 많이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있는데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되고 자녀 된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 자녀답게 산다는 게 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수단이거든요.
그래서 너희는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하면서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을 우리가 공부를 해보면 율법이 그렇게 막 복잡 우리가 볼 때는 이제 되게 복잡해 보이는데 사실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 되게 단순해요.
십계명 안에 그 율법이 사실 다 이렇게 표현되고 있고 또 그 십계명은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해라 하는 그 두 그렇죠 계명 속에 그냥 다 포함돼 있거든요.
그래서 율법이 많은 걸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아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하는 거예요.
사랑하면서 살고 또 하나님 믿는 그 믿음에서 떠나지 마라 하는 것을 요구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죠.
관계 그게 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보게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시고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세요.
그래서 그들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뭘 드러내시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 될 사람들과 백성 된 사람들과 언약 맺은 하나님이다 하는 걸 가르쳐줘요.
그게 이제 은혜 언약이라는 말을 쓰거든요. 은혜 언약 맺은 사람들이에요.
노아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그다음에 모세와 이스라엘이 모세 시대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나중에 다윗과 맺은 언약 이게 다 뭐냐 하면 은혜 언약이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셔가지고 은혜를 그냥 저기 약속을 맺는 거예요.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줄게 너는 내 백성이다 그래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 대상자에게 뭘 요구하냐면 하나님이 막 어떤 백성다운 어떤 아주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그런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믿는 믿음을 요구하세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의롭게 되는 그 언약을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스라엘 역사들 속에서 체결해 가신다는 것을 우리한테 정확히 보여줘요.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이제 이렇게 확인하게 되는 거죠.
우리 이제 장로교 아닙니까? 우리 우리 개혁파 신학을 배우는 장로교 교도들인데 우리 장로교가 가장 강조하는 것 중에 사실 하나가 이 은혜 언약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이제 제가 지금 소속돼 있는 교회도 언약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맨날 목사님이 그러세요. 우리는 이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우리 모든 교회들은 다 은혜 언약교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제 그런 말을 농담 삼아 이렇게 하고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 맺으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렇게 계속 가르쳐 주시는데 그 가르쳐 주시는 이유가 이제 있는 겁니다.
그 이유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백성 삼는 하나님 자녀 되게 하는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하고자 완성하신다는 겁니다.
그 구속에 관한 모든 일을 완성하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나머지 모든 구약의 말씀들은 하나의 그 말씀을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실체가 오기 전에 들어 계속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어떤 그림자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 언약이 우리가 얼마나 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 이제 구원받는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은혜 언약이라고 하는 게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고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그 역사 그게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그렇죠 아브라함 시대 때도 그 일이 이미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로마서의 이 논쟁을 이제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예상되는 질문을 던져가면서 답해 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래도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거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 그게 있는 거예요.
율법으로 어렵게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예수 믿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율법을 계속해서 지켜야지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어떤 율법을 근거한 어떤 구원 이 부분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는 그 문제가 유대인 그리스도인 속에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이 그런 이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걸 논증해 가는 겁니다.
로마서라고 하는 논증하면서 물론 이것을 보내는 지역은 이제 로마 교회입니다.
로마 교회 로마의 교회에 여러 이제 교회들 흩어져 있는 그 회람 서신으로 이것을 쓰도록 하면서 바울이 이걸 보내는데 그게 그 로마 교회 속에도 많은 그 어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있었단 말이죠.
그래서 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로마 출신의 그 그리스도인 헬라권에 있는 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사실은 알게 모르게 갈등 이 교리적 문제로 인한 갈등이 또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이 이것을 보내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의롭게 되고자 했던 그것은 어떤 점에서 잘못됐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데 그것을 뭘 근거로 해서 바울이 많이 가르쳐 주냐 하면 저 아브라함의 예 그렇죠 구약 성경에 특히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예를 사용해서 이걸 에게 가르쳐줘요.
그래서 바울이 우리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생각 이제 하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두 가지가 없으면 우리는 그 원물을 못 받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되게 된다는 하나님의 아담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 시대까지 계속해서 내려왔던 하나님의 그 은혜 언약 그 은혜 언약이 하나가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그 의도가 거기에 담겨 있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오셔가지고 십자가에 이렇게 달리시고 우리의 죗값을 대신해서 다 지불하신 거 있지 않습니까?
죗값을 다 지불하신 사건 그게 반드시 이제 있어야 되는데 그것만 있어서도 안 돼요.
그것이 우리에게 이렇게 적용이 돼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이렇게 적용이 돼야지 우리의 것이 되게 되는데 그것을 적용하는 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은혜의 언약이에요.
그 약속이 이미 주어져 있고 그 약속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주신 모든 그 구석에 관한 일들을 우리의 것이 되도록 이렇게 해 주시는데 그 해 주시는 그 중간에 그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이것이 효과 있게 이렇게 탁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세요.
그래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의 그 모든 구속이 우리에게 이렇게 적용이 되는데 적용이 되는 그 근거가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그 은혜 언약에 근거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사실은 다 이렇게 잘 이해해야 그렇죠.
우리의 구원이 그걸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이렇게 이제 깊이 이해하게 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면서 결국은 이제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들한테 말하면 이제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드러내 주셨지만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쉽지 않은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을 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본인들이 아들들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인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이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왕을 그렇게 불렀는데 사실 이스라엘 왕을 하나님의 아들 삼으셨다는 것은 사실은 이스라엘 전체를 아들 삼은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 이스라엘은 왕과 백성들이 따로 이렇게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연대적으로 이렇게 하나처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나로 이렇게 형성돼 있지 않습니까?
그게 사실 이스라엘도 그래요. 이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아주 독특한 모습이거든요.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이스라엘과는 그 왕과 왕에게 하나님의 어떤 통치를 위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맡기시는 거거든요.
그래서 왕과 이스라엘 전체가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장자 자녀들인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은 내 장자다 그럽니다.
이제 그 힌트를 하면 주셨는데 이것이 신약 시대에 들어서서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을 통해서 우리와 이렇게 근본적으로 맺으려고 하는 관계가 뭐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거죠.
이제 이게 정말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 하는 그 의도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오다가 최종적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고 심지어 이제 우리가 예수를 이렇게 딱 믿고 믿을 때 성령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냐 하면은 이제 우리 안에 내 주위에서 떠나지 않는 일이 발생해요.
이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자녀들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고 또 그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는 것도 구약에서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근데 신약시대하고 조금 다른 것이 뭐냐 하면은 신약시대에는 성령님께서 이렇게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명확히 가르쳐 주시고 실제로 내조하시고 떠나지 않는다 하는 것 그래서 우리 교회와 성령님께서 함께하시고 그러니까 성령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이제 우리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알죠.
하나님 사미의 하나님이시다는 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는 사미의 하나님의 개념이 없어요. 신약시대에 와서 우리가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위의 하나님이라는 걸 알게 되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삼위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 계신다는 거 그래서 우리 교회와 함께하시고 교회 안에 내주에 계시고 우리 안에 내주에 계시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거를 알죠.
우리는 그런데 그보다 이제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내주에 계시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는 것을 아주 이렇게 어떻게 알게 해 주시냐면은 마치 이렇게 부모들이 자녀가 태어나면 자녀들이 엄마 아빠를 엄마 아빠 그렇죠 부모인 줄 알고 엄마한테 엄마를 그리고 아빠한테 아빠라고 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렇게 딱 계셔서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불러도 전혀 거리낌이 없고 이상하지 않는 그런 놀라운 일을 해 주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게 그냥 이렇게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니고 물론 이제 연습하면 할 수는 있죠.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정말 아버지로 여기면서 우리 주님을 아버지 이렇게 부르는 거는 구원 안 받는 분들은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놀랍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고 싶은 마음이 소원이 막 일어난단 말이죠.
그렇게 부를 때 너무 행복하고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성경을 통해서도 알지만 실질적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이제 역사를 통해서 우리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이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그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다 가르칩니다.
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성경을 어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 가는 그 이유가 여러 가지 물론 있겠지만은 어떤 부분을 제가 볼 때는 주목해서 잘 살펴봐야 되냐면은 성경 전체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버지 되어 주려고 하셨는가 하는 그 관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를 항상 머릿속에 생각하고 성경을 보면 성경이 이렇게 좀 잘 보여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막 뭐 때로는 징계도 하시고 막 그러잖아요.
심판도 하시고 그래요.
그렇죠 그런데 그 이유를 이렇게 잘 깊이 들여다보면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저렇게 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할 때 보면은 일관성이 좀 없으시거든요.
성경을 이렇게 자꾸 이렇게 공부해 보면요. 하나님이 일관성이 좀 없으세요 어떤 때는 용서해 주셔도 될 것 같은데 막 진노를 내리시는 것 같고 우리가 볼 때는 그래요.
어떤 때는 진노를 내리셔야 될 것 같은데 진로를 또 안 내리시거든요.
막 그렇습니다. 자세히 보면은 일관성이 없으신 것 같아요.
근데 그 하나님이 어떤 점에서는 일관성이 있으시냐 하면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정확하게 일관성이 있어요.
아버지들만 하는 그런 태도로 이스라엘을 대했고 또 뭐 다윗과 같은 이스라엘 왕들을 대했고 그러니까 이스라엘 왕들이 하나님 제대로 안 믿었잖아요.
특히 북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근데 하나님이 보면은 저 정도면은 그렇죠 모세 시대 때만 해도 어떻습니까?
조금 잘못하면 막 그때 징계가 즉각적으로 내리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특히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20년가량 그 역사가 지내가는데도 하나님이 보면 굉장히 오랫동안 참으시거든요.
물론 이제 엘리아 시대 때 막 기근을 가뭄을 내리기도 하시고 그렇게 하셨지만은 그 정도 내려가지고 이렇게 어떤 감해질 수 있는 그들의 그 죄가 아니거든요.
이스라엘 전체가 통째로 다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이 참고 참고 참고 어떤 일관성 없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신단 말이에요.
그게 그 하나님의 모습을 이해하려면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는 그 어떤 그 모습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돼요.
그래서 그 모습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사실 보여주셨어요.
보여주시고 이제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재정적으로 우리에게 아주 명확하게 하나님은 너희의 아버지시다 너희는 나의 자녀다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한테는 아주 선명하게 이렇게 딱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이게 왜 이제 이제 우리가 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냐면 그러니까 1장부터 한 4장까지는 지금 방금 제가 말씀드린 이런 부분들을 사실 많이 얘기해 줍니다.
이런 부분들 물론 조금 제가 이제 조금 보태서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역사가 이제 시작되었다 그리고 너희에게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적용되었다 하는 것을 딱 얘기해 주고 사도 바울이 이제 5장에 와서 뭘 말하려고 하냐면 너희가 이제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 로마서 5장 1절 보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럽니다.
바울이 이거를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 많은 일들을 다 설명하고 그걸로 끝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뭘 말해주고 싶으냐 하면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이미 그리고 어떤 점에서 화목하게 되었느냐 그 화목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 의에 근거해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의는 어떻게 해서 주어지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이렇게 전가시켜 주어서 그렇다 하는 것을 로마서에서 가르쳐 줍니다.
나중에 6장에 보면은 그러니까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의로우신 분이잖아요.
의로우신 분인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되는 모든 순종 모든 순종이죠.
우리가 감당해야 되는 모든 순종 그리고 우리가 지불해야 되는 죄에 대한 값이죠.
죽음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또 갚아주시는 그 일을 다 해내세요.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나님은 의롭게 보셔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모든 우리가 순종해야 될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획득하신 의예요.
획득하신 그 의를 우리한테 전가시켜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본래의 그 의로우심, 하나님으로서의 의로우심은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나눠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순종을 통해서 획득하신 그 의를 그래서 그게 능동적 순종이라고 이제 우리 계파에서 표현하는데 그 능동적 순종을 통해서 획득하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는 일이 실질적으로 일어난 거예요.
그냥 너 의롭게 해줄게 이런 것이 아니고요.
예수님이 획득하신 그 의를 성령께서 우리의 각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이렇게 건네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 의를 다 받은 사람들로 있고 그 의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로 존재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중에 심판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으로 심판받을 때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가 져야 되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제 그렇습니다.
그래서 딱 보면 아는 거죠. 그 의가 우리가 막 뭐 잘못했는지 그런 거 볼 수가 없어요.
왜 볼 수가 없냐 하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다 덮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은 이런 아주 재미있는 표현 놀라운 표현이면서 재미있는 표현인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재단 뿌리 재단이 이렇게 있으면 재단의 뿔이 이렇게 4개가 이렇게 있습니다.
그 재단 뿔에 금강석 철필로 우리의 죄를 다 이렇게 딱 적어놨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이제 비유적인 표현인데 금강석 철필로 재단불에 새겨져 있다.
지금 이제 그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 제가 지금 말씀 구절이 어디 있는지는 지금 생각이 안 나는데 그 표현이 이렇게 일단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뭐 어떻게 합니까? 짐승의 피를 잡아서 그 피를 제단 양 불에 바르거든요.
그게 도색하는 거죠. 도색 도만이라고 그러죠. 도만 그렇게 해서 피가 거기에 싹 발려지면 그 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이렇게 옷 입혀져 있는 그리스도의 피는 이제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옷 입혀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허물 이런 것들을 보시지 않습니다.
그것만 딱 보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면서 이렇게 안아주시는 거지 우리가 그런 거 우리 뭐 이렇게 그렇죠 뭐 조금 더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뭐 이런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마틴 루터가 뭐라고 했냐면 우리의 그런 것들은 다 더러운 의이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리가 하는 것들은 빛나는 그 의 빛나는 의가 아니고 빛나는 아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았던 그 모든 그런 행위들을 또 하나님이 보실 때는 루터의 표현대로 하면은 빛나는데 빛나는 다 악이라는 거죠.
그것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거는 다 다 이렇게 죄인으로서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그것들을 하나님이 너무너무 귀하게 받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그것을 다 감싸서 우리의 존재를 감싸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다 감싸세요.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이 굉장히 귀하게 받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 되는 거죠. 네 그게 의로워서 하나님이 받는 받으시는 건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의 감싸서 그리고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그러니까 너무 놀라운 거죠.
사실은 그래서 바울이 우리가 그런 은혜 받은 사람들이고 하나님과 우리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 맺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모습이 나타나야 마땅하냐 하나님과 화평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된다는 거야.
그래서 이 5장에 우리가 1절부터 11절까지 읽은 말씀이 화목 화평으로 시작해서 그렇죠 11절에 보면은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10절에서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하면서 그리스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하느니라.
그리고 5장 1절에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라 그럽니다.
화평을 누리라. 그래서 어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즐겁게 사는 거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즐겁게 사는 거 이 모습이 우리에게서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상황과 형편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그렇게 크기 때문에 어떤 사실은 이제 로마서 8장에 보면은 천사들이라도 그렇죠 사망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하는 것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하나 안에 하나님과 사는 우리는 항상 즐거워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렇죠 항상 기뻐하라 그러는 겁니다.
그렇게 선포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존재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즐겁게 하나님 안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살아야 되는 존재 그렇게 살 수 있는 그 근거로 5장 5절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죠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이제 그 의가 왔는데 우리는 그 의를 소유한 우리에게 성령께서 무엇을 계속해서 깨닫게 해주냐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고 큰 하나님의 사랑인가 하는 거를 점점 깨닫게 해줘 가지고 우리 내면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해 주신다는 거죠.
그런 분이라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이미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그렇죠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점점점점 더 풍성해지는 마치 이렇게 막 사랑이 계속해서 부어진다고 말해도 좋은 그렇죠 계속해서 부어지고 우리 안에 충만해지는 그런 역사를 성령께서 해주셔서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과 맺은 그 관계 속에서 화평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 보면은 뭐 환난은 환난 중에도 우리가 즐거워하고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다는 소망 이룬다 하지 않습니까?
이게 다 그 말이거든요.
한 남도 우리를 그 관계에서 끊을 수 없다 하는 거를 얘기해 주고 그 성령의 그 풍성히 부어주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주님 안에서 화평 가운데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 하는 거를 얘기해 주고 싶은 게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로마서 말씀 같이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아버지, 아버지와 자녀 관계 맺으신 분이신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가 저희를 자녀 삼아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저희가 깊이 깨달아 갈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이미 임재하여 계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의 그 풍성함을 아는 사람들로 계속해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을 교회의 어려움 가운데 있는 것 주님께서 아시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가 처한 이런 환경 어려움에 우리가 매몰되지 않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바라보면서 그 은혜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래서 그 주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멈추지 않고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잘 나타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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