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생활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담임목사 하광영(임시당회장)

예배/말 씀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2025.03.16

예배하는자 2025. 3. 23. 23:37

로마서 10:16~21

 

임형택 목사
2025.03.16 일


지난주에 보았던 동일한 본문입니다. 로마서 10 장 16절 부터 21절도 제가 이를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하는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더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으면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느냐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서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겉으로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반갑습니다. 오늘 평안하셨습니까? 저희 교회에서는 제가 설교전에 인사를 못하는 왜냐하면 제가 44살에 왔는데 잔뜩 긴장하는 시기에 목회를 시작해서 그렇게 굳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설교 전에 인사말을 못 해요. 나이가 들고 보니까 지금 다시 시작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여러분은 제가 나이가 들어서 만나 뵙고 또 이렇게 처음 지난 번 뵈었지만 조금 여유도 있고 이 사람 하고 싶어요.

그렇게 될 수 오시고 또 하나님이 이 그루터기를 통해서 거룩한 사기 마리아를 자라게 하시기 것을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오늘 다루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기록하게 하셨고 그 종들을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을 성령의 영감은 누구냐 뇌 문제도 언어로는 하지 않겠어요.
그런 것을 좀 아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하나님을 믿지만 때때로 왜 이렇게 성경 말씀이지?
안에 있으니까 살짝 올라오다가 다시 내려가는 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다가도 어떤 순간에 그 믿음이 살짝 약해질 수도 있는 거죠.
그런 경우에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진리의 확신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배우고 연구하고 이런 것이 그 증거가 우리 안에 막 쌓이는 게 중요한 우리 한국 교회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학생 어떻게 생기는가 다 기도 많이 하면 생기는 거지 생겨 간다는 것 저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렇게 배웠고 또 그런 줄로 알고 얼마나 기도하러 다녔는지 이 군대 가기 전에 군대 갔다 와서 그때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그래야 되는 걸로 생각했어.
기도하러 간다. 삼각산에 금요일날 밤마다

어떨 때는 기도하고 싶어서 적는 참고 올라가면 굉장히 힘들 짓다 보면은 덥죠 덥죠 그래서 막 못하면 통 먹기도 했다.
20대 때 그랬던 기억이 나 그때 우리는 기도밖에 안 배웠어요.
그게 다행이다. 그렇게 하면 확신이 생기고 믿음이 생긴거라고.
근데 그렇게 알고 있던 제가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 성교 연구하면서 우리가 너무 치우쳐졌구나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져 있었구나 그런 것을 많이 깨닫게 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목회를 오래 하다 보니까 말씀 들어서도 아시겠지만 제가 하광규 목사님하고 호적상으로 동시에 나이가 같아요.
그러니까 올해 만으로 67세가 되는 것이죠. 하 목사님이 좀 빨리 은퇴해서 저도 아쉽습니다.
한밤에 나 좀 하고 싶다 그런 마음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이만큼 하다 보니까 잘못들 하면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칠 수 있게 그런 증거 확신이 그런 자료가 제 안에 꽉꽉꽉 채워진 거죠.

지금이라도 젊었더라면 제가 말 못했을 것 때 그런 것들을 내가 이만큼 나이가 드니까 오랜 경험과 그다음에 진미가 제 안에 이렇게 척척 잘려가니까 그런 확신이 꽉 차서 이제는 저를 오해하든지 말도 이제 그런 의도가 아니니까 좀 가르쳐줘야 되겠다 이런 마음에서 할 수 있게 된 거지 그중에 하나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은혜 받을 때 성경이 이에서 봤습니까?
철근에도 끝에서 봤습니까? 제가 잘못 들어가면 감히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근데 겪어보니까 아닌 거예요. 성경도 마찬가지예요.
오늘 아침에 저희 교회에서 누가복음 5장 1절부터 11절까지 설교를 예수님이 설교를 마치신 다음에 베드로에게 지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분을 내려라 이러셨다고요 그때 지몬이 뭐라고 했습니까?
요 선생님이 그랬어요. 백자는 선생님 우리가 밤의 태도를 추구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깊은 데로 가서 드물어 내려라 이 말일까요?

아니면 그 절에 배에 앉아서 예수님 시몬의 배에 앉아서 설교를 하셨거든요.
그리고 그 설교가 끝났을 때 깊은 데로 가서 그물로 내려가 이어졌다고 그러면 내가 말씀에 의지해서 기운으로 내려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 그 그 말씀은 어떤 말씀이겠어요?
깊은 데로 가 봐라 그 말일까요? 아니면 앞에서 들었던 설교일까요?
있었어 이거를 탁 두부 자르듯이 자르기는 쉽지가 않아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그마 그에 의지해서 했더라도 앞에서 들었던 말씀 때문이었던 거예요.
그 말씀이 그게 기록된 말씀입니까? 선포된 말씀입니까?
그게 교육된 책이 아니라 말 그런 것을 저도 잘못들 하면 제 얼굴이 좀 뜨뜻해질 것 같아서 못 잤을 것 같지만 이제는 후배들한테 왜 설교가 중요한가 가르쳐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더 꽉 차오르게 된 거예요.

이제 4월 8일 날 이제 4월 두 번째 주간에 저희 교회 유부 같은 교회에서 합동 신학교 가서 신학생들의 지원팀을 내려다 그때 이제 제대로 설교하라고 해서 제가 설계를 하는데 무엇 설교할 거지 저는 또 고민도 안 했습니다.
그전에는 전도사 하려고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 지난 12월부터 생각을 바꿨어요.
내가 지난주에 했던 설교 우리 최소한 볼 수 있다는 교 보고 내렸던 설교를 정리해 줘야 되겠다 딱 정했어요.
선교자한테 왜 설교가 중요한가 설교 교수가 할 수 없는 얘기를 경험적으로 설교를 많이 해본 사람이 할 수 있는 거 그런 얘기 그런 것이 어떻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 제 안에 뭐가 써 있기 때문이에요.
근거 증거가 많이 쌓인 것이죠. 그러니까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확신은 그렇게 생기는 겁니다. 기도해야 돼요. 기도해야 되지만 기도한다고 해서 확신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목사는요 성경만을 설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은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게시돼 있고 목사는 성경을 설교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저는 매주 성경을 설비했습니다.
예전에 저희 교회가 이런 말을 들은 겁니다. 이 목사는 맨날 성경만 설교하는데 딴 얘기를 안 하니까 불만인 거예요.
그럼 뭔 얘기할까요? 제가 정치 얘기할까요? 정치 얘기하면 저하고 싸워요.
그렇잖아요. 제가 지금은 중도에서 살짝 오른쪽으로 온 것 같은데 저는 중도 왼쪽이었거든요.
좀 젊었을 때 그러니까 남자 어른들하고 싸우면 이런 얘기하면 계속 싸우게 되는 거 제가 이런 얘기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설교가 될 수 있겠어요? 별 수가 없는 얘기인데요.
설교라고 하는 것은 성경 곧 기록된 말씀을 강론하는 것이 따라서 성도는요.

설교를 들을 때 기록된 말씀을 강론하는 것을 설교를 알고 그것을 하나님의 음유 성시간을 들어야 돼 성경이 읽는 것과 그 읽은 말씀을 읽던 기록된 성경 말씀을 그대로 강론하는 것이 같은 거 그러니까 성경을 강론했을 때 그때는 그 기록된 성경을 선포한 그 한 글의 말씀을 하나님 음성처럼 그렇게 들어야 된다는 거죠.
우리가 그럴까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을까요?
때로는 하나님 말씀 들을 때 막 두렵고 때로는 내 생각과는 다르지만은 그 말씀이 너무 좋고 때로는 하고 싶지 않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할까요?
설교를 하나님 음성처럼 듣는다면 그렇게 해야죠.
내 감정을 용서하고 싶지만 용서 안 하고 싶지만 하나님이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해야죠 그렇게 하는 것이 뭐예요? 설교를 하나님 음성처럼 듣는 것이 그냥 오늘 또 재미있는 얘기 한 번 했다.
목사가 좋은 얘기 한 번 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처럼 돼야 된다.

여러분이 최상한 교회입니다. 근데 교회가 이 어려움을 겪기 전에 김용덕이가 설교할 때 그런 보고서를 보고 제가 화가 많이 났어요.
막 눈이 끓었어. 실은 제가 정권 위원회에 참여하고 이럴 처지가 아니에요.
지금 제코가 숙자입니다. 주일날 오늘 또 4시에 일어나서 4시부터 아내 케어를 해주고 그리고 다 끝나면 6시 반에 아침 준비해서 아침 같이 먹고 그리고 아주머니가 8시에 오시거든요.
8시에 오시기까지 한 2시간을 쉴 틈이 없이 제가 움직여야 8시가 다 돼요.
그래서 내 전권 위원회 뭐 하고 이럴 처지가 아니야.
근데 저하고 증권 위에 할아버지가 거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무 분이 그래 화가 나 왜 그렇게 설교를 하는 왜 설교 시간에 그런 얘기를 해야 되느냐

거기에 강도사 전도사 다 우리 정권 위원회를 포함해 가지고 앉혀놓고 장로님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설명을 하셨던 것처럼 똑같은 시각을 뭐가 문제인지 알겠느냐고 보니까 뭐가 문제인지는 몰라 뭐가 문제인지 몰라 그러고 하는 말이 큰 사 그런 지에서 오직 예수 예수님만을 얘기한다.
그렇게 해서 오직 예수로 그렇게 하며 오직 유수가 더 강조되는 것일까요?
그런 식으로 제안하는 것이 올바른 방식일까요? 제가 했던 분이 하는 정도는 저희 부에서 지난 12월에 똑같이 했던 방송도 하고

만일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내가 하나님 보좌를 니가 있을 사세요 하면서 오직 예수 이렇게 얘기하면 그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인정이 될까요?
인정해야 될까요? 제가 이런 말씀드린 것은 설교의 권위가 어디서 나오는가를 말씀드리면 하는 설교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 우리 교회 목사님이 설교하면 다 권위가 있는가 그 주인들한테 묻습니다.
이럴 때 목사가 설교하니까 권위가 있는가 그렇습니까?
난 아니라고 그래 설교의 권위는요. 성경에서 나오는 거예요.
성경에 성경 말씀을 강론할 때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 목사가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복망 있고 교인들이 얼마나 많아졌고 부흥시켰고 이게 문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간과했느냐 그렇잖아 이게 문제야 제가 나눠드린 유인물 한번 보시겠습니까?
제가 찾아보게 하면 되니까 내가 친절하게 이렇게 둥글러 왔네.
알았죠? 에베소서 2장 20절에 보면 교회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턱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가 너희 교회지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닌 모퉁돌을 되찾는다. 그리스도를 목통의 돌로 해서 지어진 교회 건물 그게 뭐라는 거예요?
교회다 이 말이에요. 여기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고 하는 것은 뭘까요?
그들의 시체 위에 그런 뜻일까요? 로마 카톨릭은 그렇게 말합니다.
로마 카톨릭은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교황청에 가서 보면은 이제 빨간 바위가 하나 있고 성은 예배당 안에 자기들은 송전이라고 말하죠.
우리가 송전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개신교는 성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예배당이라는 말을 써요.
다 목사님들이 자꾸 성전 이런 말을 쓰는 거는 문을 죄다.
아니 성리 예배당에 성적이 같으면 팔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예배당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아니요.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 교회 가운데 계시는 거예요.

근데 걔네들은 건물이 성전이에요. 그리고 베드로 17일에 바이아몬드 거기에 빨간 카페트를 덮어놓고 그게 책상 하나 강단 하나 올려놔 있습니다.
그 밑에 뭐가 있을까 애들의 시체가 있다는 그들이 밑에 말을 느끼는 게 내가 이 베드로야 너는 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했으니 베드로 10개 위에다가 교회를 세웠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하는 거요?
그들이 가르친 복음의 집이요. 그들이 전한 성경 말씀이 있죠 그들은요.
성경 말씀을 전파했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그 말씀이 세워진 거예요. 그런 의미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성에 세움을 입었다라고 말씀을 에베소 교회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그 터 위에 말씀 위에 세워져.
에베소서 4장 11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말이 나와요.
그 선물은 뭐냐 하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말하는 거예요.

여기에 언급한 직분자들 보세요. 사도와 선지자와 또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뭐가 공통점이에요 시대는 다르지만 이들은 뭘 맡았습니까?
말씀을 이들은요. 자기 시대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들 이 복음을 전하도록 전 받은 자 지금은 사도가 없습니다 던지도 없습니다.
보험 전하는 자는 있지요. 목사가 있지 교사는 신학 교수에 해당한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들은 똑같아요. 뭘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말씀을 가르치도록 처음 받은 자들이에요.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이체라 말합니다.
4장 12절 같이 보겠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아멘 이는 왜 그들을 세웠는가 왜 그들을 선물로 줬는가 왜 그들을 선물로 줬어요 성도를 온전하게 풍상이라 하자.

또 그리스도의 몸은 세우려고 그들을 교회에게 총부려 줬단 말이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경 말씀을 제가 하는 줄 알고 그리스도의 설교자를 세우신 것은 그들의 말씀 사역 설교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그러면 이런 내용들을 볼 때 설교의 본위는 어디서 나와야 되겠습니까?
말씀은 온전히 가르쳐 있다는 거예요. 말씀은 저 교회가 참된 교회냐 아니냐를 보는 것을 교회의 표지라고 합니다.
교회의 표지 참된 교회의 표지 참된 교회의 표지는 세 가지예요.
뭘까요? 하나는 하나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는가 이걸 봐요.
두 번째는 총회가 합당하게 시행이 되는가 이걸 봐요.
세 번째 권증이 총량적으로 정당하게 시행이 되는가 세 가지 이 세 가지가 잘 조화를 이뤘을 때 그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표가 된다는 거예요.
그중에 제일로 중요한 게 뭐겠어요? 하나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는 거 왜 성제들이요 하나님 말씀에 지지를 받지 못하면 미신으로 갑니다.
성령이 미신으로 얻는 거예요. 성령이 지지하지 않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으면 정치하는 게 미신으로 가기가 쉽습니다.
중세 지가 어렵습니다. 권리도 마찬가지로 권쟁하는 기준이 뭐가 돼야 됩니까?

존경이 돼야 되는 거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중요하지만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뭐예요?
하나님 말씀이 온전히 호소되느냐 이게 중요하다는

설교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칼에 찍히는 바로 거기서 뭐 목사가 하나님이 여는 것을 옵니다.
뭐 내가 천사가 둘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말에 권위가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해서 권위 있게 여긴다면 그만큼 그 교인들은요.
수준이 없는 거지 수준이 없는 저는 그래서 여러분들을 가르쳐서 우리 교회에서 이렇게 저분들은 깨어 있는 분들이 목사의 설교를 듣고 분배할 수 있는 사람들 그렇게 하 저는요.
이전에도 우리 노회에 이런 사람이 있었어요. 근데 다른 이상한 여러분 교회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 노예가 아니라 다른 어떤 교회에서 부부 목사도 다 있다고 해서 여러 사람이 하도 감싸고 돌아가서 제가 우리 남 솔로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때 제가 강에 출장하지 않았어요.
안 왔습니다마는 일단 그거 다 나는 그냥 사기라고 생각 사기 치지 마 저는요.
그런 거 경험이 있거든요. 그런 집회도 많이 다녀봤거든요.

그래서 빈야들 다녀 신사도 자녀도 다 그들은요. 그렇게 해야 권위가 있을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 말씀 듣고 혼이 있을 것처럼 생각해요.
아니요. 그것은 진리에다가 가짜를 갖다 붙이는 것과 똑같아

지난번 설교 때 제가 대금 문자 155문에 대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총리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효과 있게 하십니까?
이런 말씀을 질문을 드렸었는데 그 대답 가운데 중요한 것이 뭐였어요?
말씀을 읽는 것 특별히 선포된 말씀을 효과 있게 사용해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해 드리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이 문답이 증언한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요.
설교의 권위 성령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뭘 통해서요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이렇게 여러분 그와 같은 신명기는요.
모세 설교입니다. 본문은 뭐였을까요? 신명기가 설교를 하며 본문은 뭐였어요?
본문은 레위기였고 본문은 창세기였고 민수기였고 그게 본분이에요.
신명기가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또 역사적으로 고대에서부터 신명기가 많이 가르쳐진 이유 중에 하나가 신명기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아우르는 성경입니다.
신명 명은 율법을 말합니다. 신은 거듭하신 자에요.

그러니까 두 번째 율법 다시 가르친 율법 그런 뜻이에요.
이것은요.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면서 죽기 전에 마지막 유언처럼 설교한 거예요.
그래서 신명기는 모세 설교다 어떤 분은 분석하기를 세 편을 설교다 네 편을 설교다 이렇게도 말해요.
우리 학자들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니까 저는 네 편으로 알았는데 어떤 분은 또 세 편 그러니까 또 그런가 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16기는요. 모세 설교예요. 천지사는요. 천지자들은 항상 막 기도하다가 뭐 봐가지고 그것만 얘기할 수 있다고 아니에요.
선지자들이 어떤 묵시를 받아서 괴롭게 했지만 근데 선지자들의 선지서 내용은 전부 다 뭐냐 하면 율법을 설교한 겁니다.
율법을 설교한 거예요. VR 39가지 통일성이 있어요.
어떤 내용을 봐도 항상 통일성을 가지고 있어요. 앞뒤가 안 맞는 게 없어요.
다 작용 하세요. 왜 그럴까요? 텍스트가 안 뜨거든요.

창세기 출록기 레인 미술 실명을 가지고 시대가 달라도 사람 달라도 모든 성자들이 이 어경을 가지고 설교를 했기 때문에 통일성이 생기는 거예요.
선지서는 선지자들의 모세 율법을 썼던 거예요. 산상복은 보세요.
산상복은 무슨 설교입니까? 뭐에 대한 설교입니까?
율법 설교예요. 천상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천상 복분 그 자체가 설교예요.
예수님이 산에 올라 산에 올라 앉으시니 많은 무리가 나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치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예수님 받아 적어라.
이거 하나님 말씀이다 하고 적은 것이 산상부원이 아니고 많은 무리가 올라와서 앉으니까 예수님이 입을 열어서 가르쳤던 내용 그 내용은 나중에 제자들이 기억했다가 다시 기억나요.
이게 손상 다시 말하면 천상적으로 읽으며 출발하는 것이에요.
보세요. 우서는요. 한결같이 뭐를 설교했습니까?
성경을 설교했어요. 모세도 선지자들도 예수님도 한결같이 성경을 설교했습니다.
왜요?

설교는 성경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 예수님의 제자 중에 열심 당원도 있었습니다.
열심당원이 뭐냐 하면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정권을 잡으면 환자 해야 되겠다.
다른 여자들도 그런 생각했지만 그래서 우기전 좌회전 시켜 달라고 막 엄마들이 그렇게 치마 바람 일으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열심히 당한 데 있었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이 독립을 정치할 수 있겠다 기대를 걸었던 사람.
근데 예수님은 독립을 부르짖으셨습니까? 우리가 싸우자 나를 따르라 이러셨나요?
그러니까 안 하셨대요. 천국 복음 마태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예수 천국 복음을 전하셨다 그랬어요. 천국 복음

마태복음 7장 28절과 29절은요. 선상 부원의 결론이죠.
선상 부원의 결론을 보면 천상고로 맞추셨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에요.
반응인데 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주시되 우리들이 그의 가르침을 보니 연합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대로 하니라 바르신 것과 같지 아니함이더라.
아멘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선상 고를 들어보니까 그 가르치는 것을 몰랐어요.
근데 그 가르쳐주는 것이 권위가 있다고 그랬어요.
왜 권리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했으니까 예수님이 했으니까 고지가 했고 우리가 하니까 권위가 없고 그러는 거예요.
그 뜻이에요. 여기서는 이제 대조법을 쓰고 있습니다.
누구와 누구를 대조했습니까? 예수님과 그들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들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비교해 보니까 자기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그 서기를 들었을 때 그들한테 배웠을 때는 뭐가 없었어요?
권위가 없어. 근데 예수님이 가르치신 걸 들어보니까 권위가 있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책과 바리새인들은요.
자기들이 이거 지켜야 된다.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지키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근데 지켜야 못 지켜요.
못 지키는 거예요. 못 지키니까 자기를 바꿔야 되는데, 자기를 바꿀 생각 안 하면 뭘 바꿔요?
말씀이 없을 때 그래 맹세는 누구 이름으로 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장로님, 권사님 취임할 때도 서약 하셨죠 누구 이름으로 했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경 이름으로 가고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으니까 지켜야 되겠어요 안 지켜야 되겠어요 지켜야 되겠어요.
근데 지키려고 보니까 매임세할 때는 다 지킬 생각이 있었는데 나중에 지키려고 하니까 하기 싫은 거야.
손해 볼 것 같아.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맹세할 때는 예루살렘을 두고 가든지, 하늘을 두고 가든지 또 땅을 두고 가든지 성전에 도왔든지 이렇게 살지.

예루살렘이나 하늘이나 성전에 두고 맹세하면 나중에 지키기 싫을 때 안 지켜도 된다 이렇게 하죠.
근데 예수님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
그 이로 숨 하늘에 두고도 하지 말라. 또 땅으로부터 하지 말라 이렇게 기도했잖아요.
여기에 큰 임금의 평이요. 하나님은 하늘의 보자요.
땅은 하나님은 발등상이요. 이렇게 표현한 것은 자기들을 안 지킬 생각에 그렇게 했지만은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든지 지켜야 된다는 뜻도 하지 마시.
하나님 보자인데 어떻게 안 지켜요? 하나님 발등상인데 어떻게 안 지켜요?
지킬 수밖에 없잖아. 이렇게 가르치고 나서 들어보니까 예수님이 가르치는 것이 옳은 거예요.
이 사람들의 판단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뭐가 있고요 권위가 있어 그다음에 누구와는 달라요 자기들의 소유다.
말을 수 있다 보세요. 하나님 말씀이 설교와 권위 어디서 나오느냐?

성경에서 나오는 성경을 설교할 때 나오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왜 알아야 되는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뭐라 시고 하나님 우리 몰랐었는데 우리 교회 목사가 안 가르셨어 몰라.
다 필요 없어요. 책임지고 그러니까 우리가 깨어 있어야 되는 거 같이 그게 사는 길이에요.
목사도 사는 길이고 성도도 사는 길이 맨날 가르쳐도 몰라.
맨날 얘기해도 몰라. 목사님 모르겠어요. 그냥 설교 하면 나 좋아요.
못 들어요. 그러면요. 목사는 연구 안 합니다. 연구 안 해 연구 안 하고 했던 얘기 또 해도 처음 듣는 것 같아.
그러니까 옛날 우리 어머니 세대는 그렇습니다. 나는 설교 들을 때 맨날 다 잊어버려 생각이 안 나 그렇게 말하면 쓰는 말이 오늘 콩나물 여기 콩나물 지루에 물을 주며 물은 다 빠져도 콩나물은 맞지 그래서 계속 물 줘보세요.
뭐가 됩니까? 다 썰어버리고 다 되는 거야. 하나님 말씀 들었으면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그것도 말씀을 일으켜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적으로 깨어 있어야 목사도 하나님이 무섭다고 해도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무서울 줄 모르나 회의할 때나 설교할 때는 누가 더 무서울까요?
하나님 모습과 교인들의 모습을 보세요. 교회도 좀 무서워요.
근데 교인들 좀 불편가 됩니다. 그래야 정신 차리죠.
목사가 헛소리 안 하죠. 공부하죠. 그래야 같이 사는 거예요.
목사도 살고 오려도 교회도 팔고 다 같이 파는 데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은요. 바울 사도가 어떤 사람에 관해서 말하면서 셋째 하늘에 끌려갔다고 얘기를 합니다.
내가 어떤 한 사람한테 제가 세 번째 하늘에 이끌려갔다고 그러잖아.
셋째 아들은 낙원을 말합니다. 낙원에게 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들었다고 그랬어요.
사람이 가히 말할 수 없는 거 놀랍죠. 근데 그 말 하다가 안 하는 거예요.
내가 말하기를 그만둬 하면서 내용이 하나도 안 적혀 있는 동장도 어떻게 안 나옵니다 이 말을 그만뒀죠 딱 잘라버려 왜 그만뒀을까요?
나무는 천국입니다. 천국에서 들을 듯 말 뿐 보았던 광경을 얘기했더라면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했겠어요?
바울로 천국 갔어. 하나님을 봤대 바울은 무하를 들었대.
다 얘기될 거 아니에요 그럼 바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용덕이처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자기한테 실명하게 진폭력이 있는 것처럼 여기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을 이용해 먹지 않으면 사도 바울은요. 이거 말했다 하면 완전히 대박이에요.
근데 바울은 말하지 않아요. 왜 그만뒀을까요? 12장 6절 하반전 같이 보겠습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가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어떻습니까?
겸손하죠. 이게 설교자의 겸손이에요. 설교자 겸손해야 됩니다.
사람 앞에 둬야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지나치게 높일 생각할까 봐 그만둔다.
이 말은 바보 같으면 지나치게 권위 있게 지나치게 영광스럽게 지나치게 과장해서 생각할까 봐 내가 말하기를 그만둡니다.
또 바울 사도가 천국에서 들은 것은 지금밖에 안 되는데 어마어마한 것을 들은 것처럼 사람들이 자꾸 말을 부풀리지 않겠어요 자꾸 부풀린 거라고요.
그렇게 되면 뭐가 됩니까? 모든 게 엉망이 되는 거야.
내가 그럴까 봐서 그만둔다. 겸손하죠.

이성적 설교자의 설교자의 기본 자세입니다.

설교가 성경을 경험하는 것이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다면 이제는 그래요.
젊은 사람은 어떤 자세로 들어야 되는가 어떤 자세로 이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160문인데 대여로 문다 웨스 미스터 대여로 묻는다.
160문 여러분 거기도 메모돼 있죠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선포된 말씀을 듣는 사람이 보는 것, 능력과 준비와 기도로서 선포된 말씀에 집중하고 들은 것을 성경으로 살피고 믿음과 사랑과 권위와 주신의 마음을 가지고 그 진리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고 묵상하며 말씀을 서로 나누고 마음에 가득하며 생활에서 말씀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네 가지 첫 번째 나중에 배울 때 그거를 준비해서 집중의 선택을 하라는 거예요.
그거를 자 저런 저 위해서 슬기 씨한테 좀 졸지 마라는 얘기를 보편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만 좋아요.
저기 20년 내내 좋은 거 같아 세우게 됐다는 얘기 다 본인들 알아요.
내가 능숙한 거 자기는 알겠죠.

근데 설교 시간에 돌아버리면 하나님 말씀을 언제 배웁니까?
믿음이 자라겠어요. 그러니까 그 몇몇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하나님 말씀을 다 듣게 듣는 데 하음소리는 맨날 똑같아 신앙적인 변화가 없다.
그 말이에요. 잘하지 않아. 두 번째 들은 말씀을 성경으로 살피고 그랬죠.
맞아요. 들은 것을 성경 살피고 이 말은 무엇입니까?
설교 들은 것을 집에 가서는 성경책을 펴놓고 그게 그런 말인가 아닌가 살펴봐야 아주 중요한 점 이게 좋아 듣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들은 말씀을 성경을 살펴봐야 돼요. 예배 시간을 찾으면 안 됩니다.
집에 가셔서 오늘 임 목사가 이런 얘기를 하는데 정말 성경에 그런 뜻인가 이 말씀이 그런 뜻인가 성경을 펴서 살펴봐요.

살펴보면 아 맞네 그 말이 맞네 이거 아닌데 판단이 될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게 판단이 되면 아 이거 맞구나 이게 그런 뜻이구나 싶으면 그때 한 번 암면하고 다음 주일날 교회 와가지고 목사님 지난주 설교가 아멘입니다.
제발 이렇게 좀 말해 보세요. 저는 이 시판 고 이렇게 가르쳐 제가 설교할 때 아멘 굳건히 장단 맞춰주면 저는 듣기는 기분은 좋아요.
아멘 아멘 근데요. 생각 없이 안면하지 말고 당장 안 맞혀도 되니까 들었으면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배아 교인들처럼 그 말씀을 그날과 날마다 성경을 선고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요. 낮에 광장에서 바울에게 전해준 말씀 들은 것을 말합니다.
들은 말씀을 말하는 거야. 들은 것을 다시 한 번 살고 하니 그들 가운데 믿는 자가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이 많고 그런데 집에 가서 그 말씀을 성경에 터놓고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그때 그 말씀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낮에 들었던 불교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요.

지난주 다음 주에 나와가지고 목사님 지난주 설교가 아닙니다.
목사님이 진짜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요 저는 우리 교인들이 좀 그러면 좋겠는데 지난주에 설교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많지는 않더라고요. 그렇게 돼야 돼요.
이게 요령입니다. 웨스 미스터 표준 문서 대로 문답 160문이다 들은 말씀은 성경을 보게 세 번째 네 번째 나옵니다마는 그렇게 하는 가운데 성령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믿음 있게 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자라게 하죠.
그런 의미로 믿음은 어디서 나온다고요? 들으면서 나옵니다.

들으면 그리스도의 말씀이라 그러니까 목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가 아니면 자기가 지는 말하고 있는가 정신을 차려야 그건 누가 잘해야 되는가 교회에서 다 잘해가면 좋겠는데 진짜 장로님들이 왜 장로님들의 자질을 보면 신학적인 소견이 상당한 자야 된다 이렇게 말해 그 말은 신학적으로 볼 때 어떤 생각이 들어도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불교력이 있는 사람 그래서 장모 되기까지는 신학교는 안 가더라도 이렇게 신앙고백서 공부를 잘하는 거지 저희들도 그렇습니다.
저희 교회 부임하기 전에 우리 교회도 그럴 사람이 왔어요.
근데 장로님 가운데 그런 부분에 붙여 있는 분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문제 제기해서 결국은 교회를 수습할 어 그리고 이제 제가 부임했어.

부임해서 보니까 다 떠나면 70명이 넘었더라고 그리고 다시 우리의 새생활 교회가 일치 대 교회는 여러 군데를 참여해서 교회가 다시 꾸린다는 분이 추가를 해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끼어 있잖아요. 끼어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성령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의 자주 역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 세상을 교회가 우리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정말 다투지 않으려고 예배가 싸움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 죽어 나왔지만 하나님 이 굼터기 같은 우리 세포나 교회가 쉬었다.
나 아주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 참으로 기둥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교회로 서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눈 열리게 하시고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게 하시고 하나님 이로 인해서 진리가 확고해져 가는 우리의 최상한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풀어갈 문제들 하나님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 주를 따라가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제가 축하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아버지의 크리테하신 사이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듣는 기가 열리게 하시 들은 말씀을 살펴보게 하시는 우리 세상을 교회 위해 항상 함께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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